뉴욕 3부작의 두번째 이야기, '유령들'.
이야기는 역시 앞선 '유리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려 진행된다. 특이한 점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화이트, 블루, 블랙 등 모두 '색이름'으로 흔한 이름이라는 점이다. 역시 익명성과 관련있는 것일까? 흔한 이름이기에 독자는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나 될 수 있다.
앞선 '유리의 도시'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두 이야기 모두다 '동감'에 대한 이야기다. '유리의 도시'에서 마지막 순간에 '퀸'이 느꼈을 '피터'의 고독을 상상할 수 있고, '유령들'에서 블루는 블랙에게 호감을 갖고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퀸이 스틸먼을 추적하며 지났던 수많은 뉴욕의 거리들처럼, 역시 여기서도 상상만해도 멋진 뉴욕의 풍경들을 그려내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궤적을 좆아 읽다보면 뉴욕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여서, 분명히 작가는 뉴욕을 너무나 사랑하는 뉴요커임에 틀림없으리라. 뉴욕의 풍경과 더불어 옴니버스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들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블루가 블랙을 관찰하면서 떠오르는 상념들과 추억들은 블랙의 모습과 교차적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어쩌면 산업혁명을 통해-한 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철창 속 쳇바퀴 위를 구르던 인간이 탈근대화와 함께 자유 혹은 여유로 가득찬 푸른 들판으로 돌아왔을 때의 충격을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제목에서 말하는 '유령들'이란 그런 들판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 소설 속에서처럼, 자신의 삶의 더 많은 부분이 자신보다 타인으로 가득한 사람들, 예를 들면 작가나 탐정같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비슷하겠다. 허수아비처럼.
이야기는 빛바랜 사진처럼 끝난다. 이야기는 끝이지만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폴 오스터, 그의 소설은 공허하면서도 멋지다. 작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관계'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아직 그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언젠가 낙엽이 지고 노을로 붉게 물든 뉴욕의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
아름다운 혼돈 내 20대의 비망록... live long and pros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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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 유령들 (뉴욕 3부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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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 유리의 도시 (뉴욕 3부작 中)
예전에 '파스텔뮤직'의 어떤 음반을 사고, 이벤트 상품으로 받았던 '폴 오스터'의 대표작이라는 '뉴욕 3부작'. 첫번째 이야기 '유리의 도시'.
솔직히 이야기하면 참 혼란스럽다.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익명성과 진실된 이름, 그리고 인간의 추락... 이런 것들이 작가가 전하려는 내용인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에서 '윌리엄 월슨'이라는 필명으로 '맥스 워크'의 이야기를 쓰는 '데니얼 퀸'의 관계는 '폴 오스터'란 필명으로 '데니얼 퀸'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관계를 빗댄 모습일지도 모른다. '폴 오스터'가 작가의 본명이라면, 소설 속 오스터의 친구인 화자의 입으로 '데니얼 퀸'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의 관계로 대치될 수도 있겠다. 사실 무명의 화자는 소설 속 '폴 오스터'일 수도 있겠다.
소설 속 '돈키호테에 대한 대화'-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실존 인물이고 돈키호테의 의도에 의해 세르반테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는-처럼 소설 자체도 그 형식을 빌린 듯도 하다. 하지만 소설 속 돈키호테가 누군지 확실하지는 않다. 데니얼 퀸일 수도, 폴 오스터일 수도 있다. 사실 두 인물이 동일이거나, 퀸은 단지 소설 속 오스터가 지어낸 인물일지도 모른다. '돈키호테(소설 속 폴 오스터 혹은 데니얼 퀸)'를 실제 지어낸 사람이 돈키호테(작가 폴 오스터)이과 소개하는 사람이 '세르반테스(소설 속 화자)'인 것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서 쓴다고 했지만, 써놓고 보니 참 어지럽다. 유리의 도시가 그렇다. 익명성의 탈을 쓰고 시작된 이야기는 진실된 이름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고 다시 이름을 잃어가는, 어쩌면 존재를 읽어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한 사람으로서의 현대인의 익명성. 작가는 뉴욕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 서로에게 무관심한, 그 익명성에 대해 생각하길 바란 건 아니었을까? 이름이 존재를 나타낼 수 있을까? 우리의 명함과 물질들이 이름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 명함과 물질들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이름도 존재도 사라지는 것을까? 진정한 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이름은 무엇일까? 이런 이상한 질문들이 자꾸 떠오른다.
어린 시절을 어둠 속에서 보냈던 '피터 스틸먼'처럼, 데니얼 퀸도 마지막에는 피터의 경험을 하게된 것일까? 명함과 물질을 잃어가면서 피터의 아버지 스틸먼이 피터에게서 찾으려했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간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소설 속에 누가 '아(我)'이고 '타(他)'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어파리 사람의 본명 또한 다른 수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또 다른 익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뉴욕이라는 대도시 속에서 펼쳐지는 꿈같은 현대식 도시형 판타지가 바로 '유리의 도시'를 조금은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일 수도 있겠다.
*작품의 깊이에 조금은 놀랍기도 하다. 아직 문학에 대해 짧은 나에게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깊이 차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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